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니발 바르카 (문단 편집) ==== 로마의 반격과 전략/전세의 한계에 봉착한 한니발 ==== >'''"역시 신께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는 않는군요. 승리하는 법을 잘 아시는 장군님이 정작 승리를 활용하는 법은 모르시다니요."''' >---- >한니발군 기병대장 [[마하르발]][* 칸나이의 대승 직후 한니발에게 기세를 몰아 즉시 로마 본국을 치자고 제안했다. 그는 [[자오곡 대책|자신이 기병대를 이끌고 앞서가고, 한니발이 뒤따라가면 5일 이내에 원로원 의사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다만 한니발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하르발의 한니발에 대한 평가.][* 하단의 정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칸나이 대승 이후 한니발로선 자군의 역량으로 로마를 조기에 점령하기 어려웠다. 또 이제껏 보여준 한니발의 지휘 능력을 감안하면 로마 수도를 함락하면 끝나는 싸움에서 로마 공격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 한니발조차 자군 역량으로 로마 공격이 무리라고 생각했다는 게 현 [[역사학자]]들의 평가다.] 그러나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의 승리로도 로마를 완전히 붕괴시키지는 못했다. 분명 카푸아와 더불어 적지 않은 도시들이 로마로부터 이탈하기는 했다. 그러나 로마와 함께하기로 한 동맹 도시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이는 각 도시의 지배층이 로마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큰 이유는 동맹에 대한 '''자치권 보장'''이였는데, 로마는 전쟁할 때마다 병력과 물자만 지원, 제공해주면 동맹시의 내정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조군으로 차출되는 시민들만 불만이 있었을뿐, 도시를 좌우지하는 지배층과 로마의 관계는 양호했다. 그렇다고 로마 본국을 공략하는 것은 어려웠다.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과 달리 한니발은 두뇌형 무장이었으므로 [[공성전]]에도 조예가 있었다. 보통 책략으로 배신자를 만들어 안에서 성문을 열게 하는 쪽을 선호했던 걸 보면 공략전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쓴 것이다. 어차피 오합지졸 갈리아 용병들에게는 공성전에 순순히 갈려 넣어지기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한니발의 정치적 계산대로라면 칸나이의 대패로 로마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야 했고 로마의 동맹국들이 죄다 배신하여 자신에게 붙어야 했는데 한니발의 끊임없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도시들 대부분이 카르타고를 불신하며 로마와의 동맹 서약을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는 포위전을 한다 해도 로마 측 지원군에 의해 오히려 역포위당할 위험이 컸던 것이다. 칸나이에서의 뼈저린 희생 이후 로마군은 전술을 아예 바꾸어 한니발을 곤혹스럽게 했다. 로마의 지배적 여론이었던 화끈하게 맞짱 떠서 이기자는 상남자론은 사그라들고 이제까지 쫄보 하남자라고 무시당해왔던 '''주저하는 자''' 파비우스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한니발이 아무리 유능한들 결국 개인이고, 그가 관리해야 할 병사들과 영토는 그 혼자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로마군은 한니발과의 전면전을 철저히 피하고 한니발이 공격하는 도시는 무시로 일관하는 대신, 그가 없는 도시는 바로 공격해 되찾아오고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는 병력은 그가 없다는 게 확인되자마자 달려나가 때려잡았다. 그렇게 로마군은 한니발의 보급을 방해하고 그의 병력을 조금씩 갉아먹어 갔으며, 빼앗긴 땅은 그가 없는 사이 도로 되찾았다. 이렇게 한니발은 추가적인 결정타를 가할 수 없고, 로마도 [[지구전]]만을 하다 보니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전쟁은 소모전의 양상으로 바뀌었고, 한니발은 파비우스의 지구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한니발 개인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이 미비했던 탓이었다. 사실 카르타고도 한니발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이후 동생 마고를 보내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카르타고 정부도 이에 응했다. 특히 카르타고는 마고에게 [[보병]] 1만 5천 명에 [[기병]] 1천 2백 기, [[전투 코끼리]] 20마리로 구성된 지원군을 맡겼다. 이 병력은 [[전투함]] 60척에게 호위를 받으며 [[이탈리아]]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만한 지원군과 물자가 한니발에게 도달하지 못 했던 것이다. 왜냐면 비슷한 시기에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카르타고에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사르데냐]] 섬에서는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이 카르타고 본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반면, 히스파니아에서는 카르타고의 남부 영토에서 대대적인 원주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함대가 에브로 강 전투에서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 대패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래서 카르타고 정부는 일단 보병 1만 5천 명과 기병 1천 5백 기를 포함한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사르데냐]]로 파견해야 했다. 하스드루발에게도 보병 4천 명과 기병 5백 기를 보내주었다. 각 군대에는 임무를 마치면 이탈리아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카르타고군은 우선 사르데냐를 노렸다. 당시 사르데냐는 로마군의 중요한 식량 보급지였다. 한니발로 인해 이탈리아 본토에서 식량 수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르타고가 이곳을 점령하면 로마 본국을 더더욱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물론, 로마군도 이를 모를 리가 없어 사르데냐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했다. 특히 제해권을 장악한 로마군은 인근 해역을 철통같이 감시했다. 그래도 운이 따라준 덕분에 카르타고군은 무사히 사르데냐에 상륙했다. 그러나 상륙한 카르타고군은 고작 2만 5천여 명의 병력이어서 로마군에 숫적 우위를 가지지 못 했다.[* 여기엔 불운한 뒷사정도 있었다. 카르타고의 원군이 상륙하기 전 그들은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이를 피하기 위해 [[발레아레스 제도]]에 잠시 정박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 로마군과 사르데냐 반란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반란군 측이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은 것이었다. 이 손실은 나중의 전투에서의 카르타고군의 패배를 초래했다.] 게다가 로마군의 지휘관들과 병력들이 전반적으로 카르타고군에 비해 우수했다. 그래서 로마군은 코르누스 전투로 사르데냐에 상륙한 카르타고군을 손쉽게 격파했다. [[히스파니아]]에 보낸 카르타고군의 병력 역시 [[로마군]]에 격파당했다. 하스드루발이 지휘관으로서 나름 분전했으나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로마군에 격파당했다. 이 패배로 이탈리아로 향할 예정이던 마고 바르카의 원군은 스페인으로 항로를 바꾸어야 했다. 당연히 한니발에 대한 지원은 늦어졌다. 다만 코르누스 전투 이후 카르타고 본국의 함대 일부가 이탈리아 로크리에 도착하기는 했다. 한니발은 그나마 [[누미디아 기병]] 4천 기와 [[전투 코끼리]] 40마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카르타고는 [[누미디아]] 시팍스의 반란에 직면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히스파니아에서 스키피오 형제를 상대하던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아프리카]]로 소환당했다. 카르타고 본국이 위험에 처하니 더욱 한니발에게 보급을 해줄 여유가 없어졌다. 그나마 히스파니아 전선은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대규모 원군이 도착하여 안정되었다. 그래서 [[누미디아]]의 반란을 진압할 수는 있었다. 히스파니아에서 스키피오 형제들은 계속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자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스키피오 형제와 동맹을 맺고 있던 현지 부족들을 매수했다. 그리하여 현지 부족들의 배신으로 약화된 로마군을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두 스키피오 형제도 전사했다. 그러나 다음해에 곧바로 스키피오 형제 중 동생의 아들이자 형의 조카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침입해 카르타고 노바를 점령했다. 젊은 스키피오는 후대의 명성대로 엄청난 [[명장]]이었다. 그와 맞선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모두 패배했다. 히스파니아 주둔군을 돕기 위해 카르타고 본국은 마지막 이탈리아 원정 병력까지 모두 히스파니아에 파견했다. 이렇듯, 카르타고는 한니발을 지원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나 그럴 여력이 남아돌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면 다른 전선에서 한니발 이외의 장군들이 로마군에 계속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닥치는 대로 가용 병력을 동원해서 구멍 난 전장에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당장의 급한 불을 끄느라 한니발에 대한 지원이 기약 없이 연기되고 말았다. 한니발의 공적을 시기한 정적들이 고의로 지원을 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으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료에 따르면, 당시 카르타고의 의회에서 대다수의 의원들이 한니발이 거둔 승리들에 고무되어 어떻게든 그에게 지원을 보내려 애를 쓰고 전쟁을 확대하고자 했다. 소수의 소장파 의원들만이 로마와 협상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카르타고는 한니발에게 충분히 열의를 다한 지원을 했지만, '''그 지원이 한니발에게 도달한 건 기원전 214년 딱 1번 뿐이었다.''' 로마 역시 사실상의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로마는 해마다 20개 군단씩 편성하여 각지에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로마는 한니발을 상대로는 전투를 피하면서 많은 병력을 보전하고 카르타고 식민지를 공략하는 전략을 취했다. 병력의 양질에서 밀리는 카르타고는 '''편성 → 몰살 → 재편성''' 식의 손실을 계속 감당해야 했다. 결국, 한니발이 지원을 받지 못 한 근본적인 원인은 카르타고군의 전반적인 전투력이 로마군에 비해 열세했다는 데 있다. 한니발을 제외하면 당시 카르타고군은 병력의 규모, 병사들의 숙련도, 지휘관의 능력까지 총체적으로 로마군에 비해 뒤떨어졌다. 그래서 카르타고는 당장 로마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전선에 가용 자원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이는 한니발이 받아야 했을 자원까지 잠식해버렸다. 가뜩이나 적에 비해 물량이 밀리는데도 카르타고군은 병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는 카르타고의 지휘관들이 로마군 지휘관들에 비해 지휘력이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수의 승리를 제외하면 로마군에 연패하며 병력과 물자를 소모하기만 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한니발 없이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한 적은 단 1번 뿐이었다. 특히, 대규모 [[회전#s-2]]에서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에 맥을 못 추었다. 베티스 고지에서 스키피오 형제를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이긴 것이 유일한 승리였다.] 그 와중에도 한니발만은 로마군을 회전에서 연파했지만, 그래도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한니발은 이탈리아 중부를 초토화하고 6개 군단을 연이어 전멸시키는 대활약을 했다. 기원전 212년 [[실라루스 전투]]에서는 매복으로 3개 군단에 해당되는 1만 5천여 명의 병력을 전멸시키고 그 뒤 헤르도니아에서 3개 군단을 더 괴멸시켰다. 그러나 한니발이 이탈리아 남부의 [[타렌툼]] 근처로 내려가자 로마는 그 틈을 노려 한니발이 휩쓸고 간 지역들을 수복했다. 더욱이 두 명의 집정관들이 5만에 달하는 6개 로마 [[군단병]]과 6개의 동맹시 군단을 동원해 북부의 맹주였던 도시 [[카푸아]]를 포위하였다. 이에 한니발은 로마군과의 결전을 노리고 다시 북상했지만 로마군은 역시나 회전을 피했다. 그래서 한니발은 코끼리를 앞세워 로마군의 카푸아 포위망을 와해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로마군이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지켜 난관에 부딪혔다. 이때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지휘관인 두 로마 집정관 중 한 명이 창에 관통상을 입을 정도였다. 포위망이 풀리지 않자, 한니발은 로마를 직접 공격할 것이라고 거짓 소식을 퍼트렸다. 한니발은 이러면 로마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군이 카푸아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니발이 로마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자 로마 시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리비우스는 기록했다. 이 뒤로 [[라틴어]]에 "문 앞에 한니발이 왔다.(Hannibal ad portas)"라는 관용어가 생겼다. 주로 풍전등화, 박두한 위험, 위기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다급한 상황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로마군은 포위를 풀지 않았다. 사실 로마는 매우 견고한 성벽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기에 로마군은 안심하고 포위를 지속할 수 있었다. 끝내 카푸아는 다시 로마에 함락됐다. 이때 카푸아의 배신을 주도한 카푸아 원로원 의원들은 다수가 자살했으며, 살아남은 의원들도 로마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리고 배신을 한 대가로 카푸아는 로마의 [[동맹국]]에서 [[속주]]로 격하되었다. 로마가 카푸아를 탈환한 이후 이탈리아의 전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타렌툼]]도 친(親) 로마계의 정치가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의 동맹에 복귀했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2년 만에 점령당했다. 이 와중에 [[시라쿠사]]를 구원하기 위해 상륙한 카르타고군은 또 전멸했다. 설상가상으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군을 궤멸시켰다. 히스파니아에 남아 있던 한니발의 막냇동생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여전히 7만이 넘는 카르타고군 병력을 보유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스키피오가 이끄는 4만 8천의 [[로마군]]과 회전을 벌였으나 [[일리파 전투]]에서 전멸했다. 이로써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군은 일소되었다. 스키피오가 [[일리파 전투]]에서 거둔 군사적 성과는 [[칸나이 전투]]와 비견될 정도로 대단했다. 스키피오에게 패배한 하스드루발은 히스파니아를 포기하고 아예 이탈리아에 있는 형에게 합류하기 위해 남은 부대를 이끌고 [[갈리아]]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향했다. 한니발은 '''한니발을 고립시키고 그 사이 카르타고의 식민지를 평정한다'''는 로마의 [[대전략]]에 점차 수세에 몰렸고 로마 역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고는 있었으나 한니발에게 입은 손실이 누적되어 전쟁 수행에 한계에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한니발과 로마 모두 하스드루발이 지원군을 이끌고 한니발에게 향한다는 급보를 접했고, 전쟁의 큰 변수가 될 소식에 한니발은 동생과 합류하기 위해, 그리고 로마는 당연히 이를 저지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한니발은 '''여기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알프스를 넘느라 고생한 자신의 경험으로 미뤄보아 하스드루발이 알프스를 넘는 데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스드루발과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조우할 수 있도록 북상을 늦춘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 장화 끝까지 몰린 상태에서 동생과 합류하기 위해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혹시나 로마한테 [[빈집털이]]라도 당할까 우려해서 점령지에서 최대한 버티다 움직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기껏 군대 이끌고 나가 동생이랑 합류해서 돌아왔는데 점령지가 털려버리면 말짱 꽝이니까. 실제로 로마군 역시 이 점을 노리고 한니발을 지독하게 견제했다.] 그런데 한니발의 예상과 달리 하스드루발은 형보다 훨씬 수월하게 알프스를 넘은 상태였다. 일단 [[겨울]]이 아니었고, 한니발이 주변의 갈리아족들을 대부분 우군으로 포섭해놓았던 결과였다. 오히려 하스드루발은 우호적인 [[갈리아인]]들로부터 추가로 병력 지원까지 받아서 병력이 5만으로 늘었다. 그 바람에 한니발의 예상보다 일찍 이탈리아에 도착한 하스드루발의 전령이 한니발에게 가다가 로마군에 의해 붙잡혔다. 하스드루발의 편지를 입수한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바로 정예병 보병 6천 명과 기병 1천 기를 이끌고 신속히 하스드루발의 진격로를 막았다. 거기에 리비우스의 로마군 3만여 명까지 합류해 대군이 하스드루발을 저지했다. 양군은 북이탈리아의 [[메타우루스 전투|메타우루스 강변에서 격전을 벌였다.]] 네로에 의해 카르타고군은 궤멸당하고 하스드루발도 전사했다. 결국, 전쟁의 큰 변수가 될 수 있었던 마지막 보급과 지원군도 한니발에 당도하지 못 했다. 그 이후에 한니발의 전황이 워낙 불리해져서 한니발을 지지하던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한니발을 배신하고 로마 지지로 돌아섰다. 결국 한니발은 이탈리아 장화 발 끝인 브루티움으로 몰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